브랜드

상표는 1875년 이노센시오 알바레즈(Inocencio Alvarez)와 마닌 가르시아(Manin García)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브랜드 의 이름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의 스페인어 이다. 1885년과 1900년 사이에, 다양한 시가 경연 등에서 우승을 했고, 그것이 현재까지 로고에 금색 메달로 표현돼어 남아있다. 사실 이 브랜드가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를 떨치고 다닌 건, 현재로 치면 셀럽이었던 ‘호세 로드리게즈 페르난데즈(José "Pepin" Rodriguez Fernández)’가 이 시가를 태우며 미국과 유럽을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모는 말에 올라탄다는 것 은 곧, 유명해지는 지름길과도 같은 것이고, 그렇게 세계를 향해서 레이싱을 했다. 이 브랜드의 시가가 가장 활발하게 팔리던 때는, 약 2000개의 밴드가 있었다고도 하니, 그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로드리게즈의 사후(1954년)에 이 시가 브랜드에는 가히 혁명이라고 할 만 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알타디스 유에스에이 (Altadis U.S.A)사의 주도 아래 도미니카 공화국의 ‘라 로마나(La Romana)’로 거취를 옮긴 것이다. 현재까지도 아메리칸 대륙 시장에서 활발하게 팔리고 있는 ‘로미오 이 훌리에타(Romeo y Julieta)는 그렇게 시작됐다. 쿠바 정부는 이 브랜드를 국영화 해서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것들 중에 한 시가로서 그 역할을 다하는 중이다.
2023-08-24 00:32:04

파르타가스 시가는 독립적인 두개의 생산 라인으로 나눈다. 하나는 쿠바에서 생산되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도미니카 공화 국에서 생산 되는 것이 있다. 쿠바산 파르타가스는 당연히 쿠바 주정부 소유의 국영기업 것이고, 도미니카산 파르타가스는 덴 마크의 ‘스칸디나비안 토바코 그룹(Scandinavian Tobacco Group)’ 산하 ‘제너럴 시가 컴퍼니(General Cigar Company)’ 소유이다. 카탈로니아(스페인 지중해 연안) 사람이었던 ‘돈 하이메 파르타가스 이 라벨(Don Jaime Partagás y Ravell, 1816-1868)’ 이 1831년 쿠바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1845년, ‘라 플로르 드 타바카스 데 파르타가스(La Flor de Tabacas de Partagás)’ 라는 그의 공장을 세웠고, 일대에서 유명했던 생산 농장들을 사들여가며 그 덩치를 키웠다. 다양하게 있는 시가잎들 중에서 최고의 것들만 골라내고, 그만의 방식으로 블렌딩하고, 숙성하는 ‘돈 하이메’의 능력은 단숨에 그의 브랜드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돈 하이메’는 또한 처음으로 ‘렉터(Lector)’를 고용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시가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시가 잎을 말고, 분류하는 작업을 하는데, 이 단순 노동이 상상이상으로 지루한 작업이기도 하고, 반복된 것만을 해야하다보니 피 로도가 굉장히 높다. 그 부분을 조금 환기하기 위해서 이른바 ‘렉터(글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한다고 한다. 그 렉터들은 한 켠 에서 큰 소리로 현재의 뉴스나, 재밌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공장 노동자들의 흥을 올려준다고 한다. Don Jaime was murdered on one of his plantations in 1868[2] and his son José Partagás took over the business.[1] Later the factory and brand were sold to banker . 아쉽게도 그는 그의 농장에서 1868년 살해 당했다. 그렇게 그의 아들이었던 ‘호세 파르타가스(José Partagás)’에게로 가업 은 이어졌다. 후에 이 공장과 브랜드는 은행가였던 ‘조세 아 밴서스(José A. Bances)’에게 팔리게 된다. 1899년, 이 ‘밴서스’는 재능있는 시가 사업가 였던 ‘라몬 씨푸엔테스 리아노( Ramón Cifuentes Llano)를 회사의 파트너로 초대했다. 1960년 9월 15일.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정부군이 이 파르타가스를 포함해서 여러 시가 공장들을 에워쌌다. 오후 6시 30분이 되자, 군인들은 파르타가스 공장으로 들이닥쳤고, “우리는 이 회사에 개입하기 위해 왔다.” 라고 했다고 후에(1991 년) 씨푸엔테스는 회상했다. “심지어 그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들고 나갈 수 없게 통제했습니다.” -씨푸엔테스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쿠바의 가장 잘 팔리는 시가중 하나인 이 파르타가스는 그렇게 쿠바 주정부의 손으로 넘어간다. 2002년,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임페리얼사 산하 알타디스가 시가 공급자로서의 판권을 시가 정부로부터 사게 되면서 시가 생 산의 판도가 바뀌게 된다. 전부 손으로 만들거나 기계로 만드는 시가들 중에서 불편할 정도로 긴 사이즈나 잘 팔리지 않는 것 들은 과감하게 생산을 없애버리며 점진적으로 영업 방향을 바꾸어 나갔다. 파르타가스의 덜 유명한 시가들도 이때에 많이 역 사속으로 사라졌다. 오늘날의 파르타가스는, 거의 매년 특별한 사이즈의 시가를 생산하는 재밌는 문화가 있다. 2001년의 ‘세리에 디 넘버 쓰리 (the Serie D No.3)’, 2003년의 ‘세리에 디 넘버 투(the Serie D No.2)’, 2008년의 ‘세리에 디 넘버 파이브(the Serie D No.5)’ 등이 있다.
2023-08-26 14:20:07

‘코히바’는 앞선 ‘파르타가스’ 시가 처럼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쿠바에서 생산되는 쿠바 주정부 소속의 시가가 있고, 다 른 하나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그 예이다. ‘코히바’ 라는 이름은 타이노(Taíno)족 언어로 ‘담배’ 라는 뜻이다. ‘쿠바의 코히바’는 1966년에 만들어 졌지만, 초기에는 소량의 제한적인 생산만을 해서 쿠바의 혁명가이자 독재자였던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 공산당의 고위급 간부 그리고 쿠바 정부 관계자들에게만 독점적으로 공급했었다. 주로 외교적인(정치적인) 선물로 활용 됐었는데, 이것이 점점 코히바 라는 브랜드를 상징하는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졌다. 그러다가 대중에게 처음으로 선보인 것은 1982년이 돼서였다. +코히바 시글로 6(Cohiba Siglo VI) 같은 경우는 블라인드로 진행한 리뷰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기도 했었는데, 바꾸어 말하면 “이 시가는 한 번 도전해보는 것이 좋다.” 라는 뜻이다. ‘미국의 코히바’는 1978년에 제너럴 시가 컴퍼니에 의해 미국에서 시작할 수 있었고, 현재와 같은 정도의 대량 생산을 하게 된 건 1978년 도미니카 공화국 에서부터 였다. 이 미국의 코히바와 쿠바의 코히바는 오직 이름만 공유할 뿐이고, 미국의 코히 바에는 쿠바산 담뱃잎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직 코히바만이 미국에서 법적으로 판매가 가능한 것이다. (미국 은 쿠바에 대해 무역 금지령을 실시하고 있는 상태이다.) 쿠바의 코히바는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델 카스트로의 보디가드가 개인적으로 공급 받아오던 한 지역의 시 가를 만드는 장인이었던 에두아르도 리베라(Eduardo Rivera)의 시가를 공유하면서부터 였다. 카스트로는 이 시가들을 아 주 좋아했고, 삼엄한 경비 아래 오직 카스트로와 그의 가장 가까운 정부 관료들만을 위한 시가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카 스트로는 1994년에 말하기를, “나는 아주 아로마틱하고, 품질이 좋은 시가를 태우던 남자를 보곤 했다. 그래서 그에게 그가 태우고 있는 것이 어떤 브랜드의 시가인지 물었고, 그가 말하길 그 시가는 아주 특별한 블렌드의 시가이며, 어떤 한 남자에게서만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 남자를 찾자. 결국 그 남자의 시가를 태우게 됐고, 그에게 꾸준히 연락하며 어떻게 이렇게 좋은 시가를 만들 수 있느냐며 말하곤 했다. 종국에 우리는 그의 블렌드 방식을 사용하는 [엘 라귀토(The El Laguito)]라는 이름의 공장을 짓게 됐다. 그는 어떤 농장에서 나오는 담뱃잎을 쓰는지, 랩퍼는 어떤 곳의 것을 쓰는지 등등 많은 것을 일러주었다. 그 결과, 지금 의 코히바가 있게 됐다.” 아무튼, 카스트로와 그의 친구들(고위공직자)을 위한 이 특별한 시가들은 타이트한 보안 아래에서 만들어졌다. 그 이유로는 독극물을 묻힌 시가를 준비하는 등 미국 CIA를 비롯한 미 정부의 여러 차례 암살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쿠바의 코히바가 하나의 프리미엄 시가 브랜드로서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부터 였다. 이 시기에 코히바는 3개의 시가 사이즈를 정의하며 출시 했는데, 빠나뗄라(the Panetela: 카스테라의 일종), 코로나 에스페셜(the Corona Especial: 특별한 왕관), 란쎄로(the Lancero: 창을 든 병사) 가 있다. 후에 1989년, 세 개의 사이즈가 추가된다. 로부스토(the Robusto: 튼튼한, 씩씩한), 엑스퀴지토(the Exquisito: 훌륭한, 맛 좋은), 에스플렌디도(the Espléndido: 화려한,훌륭한)가 있다. 이 6개의 사이즈가 클래식 라인 사이즈로 알려지게 된다. 1992년 ‘라인 1492(Línea 1492)’를 출시하게 되는데 이것은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그의 함대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각각 시글로 1, 시글로 2~시글로 5까지 출시했으며, 2002년에 시글로 6가 추가된다. 더욱이 매년 다양한 리미티드 에디션을 만들기도 하는데, 마두로 잎으로 만든 ‘마두로 5’가 유명하다. 대략 6000만개의 시가들이 코히바라는 이름을 가지고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2023-08-26 14:21:47

1935년 7월, 알론소 메넨데즈(Alonso Menédez)가 공장 한 개 를 인수하면서, 바로 몬테크리스토 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출범시킨다. 이 이름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동명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The Count of Monte Cristo)에서 따왔다. 그 이 유는 생각보다 단순한데, 그가 인수한 공장의 렉터(글 읽어주는 사람)가 공장 안 노동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어줘서 유명했던 소설이 몬테크리스토 백작 이었기 때문이다. 몬테크로스토의 로고는 플뢰르 드 리스(Fleur de lis)를 여섯개의 검이 삼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디자인은 이 브랜드의 영국의 배급업자 였던 존 헌터 모리스와 엘칸에 의해 만들어졌다. **플뢰르 드 리스: 양식화된 백합 모양으로 된 장식 문양으로서 보통 3개, 때론 5개의 꽃잎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 는데 5세기 클로비스 왕 시절부터 사용되었던 문양으로 12세기 카페 왕조의 문장(紋章)으로 채택되어 16세기 부르봉 왕조를 거쳐 19세기에 프랑스 공화국이 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영국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왕족과 귀족들의 문 장으로 쓰였으며 14세기에는 창의 장식무늬인 트레이서리(tracery)에, 16~17세기에는 조각 문양으로도 쓰였다. 중세 피렌 체의 무기나 동전에도 이용되었다. 알프레드 던힐(Alfred Dunhill company)사의 노력 끝에 쿠바산 시가 판매량의 1/4을 담당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쿠반 시가가 됐다. 그러던 1960년 9월 15일, 메넨데즈는 쿠바 혁명을 피해 쿠바를 떠난다. 자연히 몬테크리스토 브랜드는 피델 카스트로의 혁 명 정부에 의해 국영화된다. 메넨데즈는 카나리아 제도(the Canary Islands, 아프리카 대륙 모로코 옆 스페인령)에서 몬테크리스토를 다시 세우지만, 쿠 바 정부와의 상표권 다툼으로 멈추게 된다. 1970년대 중반, 도미니카 공화국의 라 로마나(La Romana)로 옮긴 메넨데즈는 미국 시장을 위한 판매를 시작한다. 그리고 후에 최고의 토르쎄도레스(스페인어:시가 만드는 사람) 중 하나인 호세 마누엘 곤 잘레즈가 메넨데즈 사후의 사업을 이어간다. 1970년과 1980년대에, 5개의 크기별 시가가 추가된다. A, 에스페셜 넘버 1와 에스페셜 넘버 2, 호이타(the Joyita,스페인 어:보석), 쁘띠 튜보(the Petit Tubo,스페인어:작은 관). 이어서 다른 크기의 시가 3개가 추가되지만, (몬테크리스토 넘버6, 넘버7, B) 후에 추가적으로 생산이 이어지지는 않는다.
2023-08-26 14:23:33

업만은 은행가였던 헤르만 디트히쉬 업만(Hermann Dietrich Upmann)에 의해 만들어진 프리미엄 시가 브랜드이다. 현재 는 영국의 임페리얼 브랜드 소속이다. 쿠바 주정부 소속으로 쿠바에서 생산되는 것이있고,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생산되는 것 이있다. 업만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가 브랜드이다. 무려 1843년, 업만이라는 은행가가 수출입을 하는 독일 회사와의 일로 쿠바 의 하바나에 도착하면서 부터 였다. 이 시가라는 산업의 수출 가능성을 내다 본 업만은 한 로컬 시가 공장을 인수한다. 이 공 장은 업만의 지휘아래 1844년 부터 상업적인 생산을 시작한다. 업만이 인정 받는 영업 전략 중에 하나로 체다 우드 박스를 활용해서 시가를 포장 판매 한 것이 있다. 1800년대 후반까지 업만은 시가 브랜드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 갔다. 세계 1차 대전의 발발하면서 업만과 그의 회사는 쿠바와 미국에서 얻어낸 영업이익을 독일군의 전략을 위해 썼다. 후에 1916 년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일어난 반란을 조장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쿠바의 장군이었던 호세 미구엘 고메즈에게 무기와 자금을 대며 선출을 통해 대통령이 되는 마리오 가르시아 메노칼에게 대항하는 쿠데타도 지원했다고 한다. 업만의 은 행 건물은 멕시코와 유럽을 오고가는 독일군 스파이의 비밀 기지로 사용됐다. 쿠바 정부가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1917년 4월, 업만의 은행은 30개월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그해 12월에는 미국이 외국 기업들을 상대로 한 거래 금지등의 제재 조치 리스트에 첫번째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당연하게도 몇 년 간의 제 재로 인해 그의 은행과 시가 회사는 파산하게 된다. 그렇게 이 브랜드는 몬테크리스토를 만든 메넨데즈에게 팔리게 된다. 쿠바 혁명 이후, 카나리아 제도로 회사를 옮긴 메넨데즈(몬테크리스토 편에서 설명)는 후에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가서 생산을 이어간다.
2023-08-26 14:25:11

쿠바에서 생산되는 것과 온두라스에서 생산되는 것이 있다. 1831년, ‘돈 호세 제너 이 바테’ 가 스페인에서 쿠바로 13세의 나이로 이주해왔다. 그는 그의 삼촌의 농장에서 일하게 된다. 20년 후, 그는 자신의 시가 공장을 연다. 이것이 호요 데 몬테레이의 시작이다. 스페인어로, ‘몬테레이의 구멍’ 이라는 뜻이다. 좋은 담뱃잎을 만드는데에 이상적인 완곡한 지형을 빗대어서 지은 이름이며 특 히 영국의 시장에서 잘 나갔던 이 시가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쿠바 혁명 이후, 미국의 플로리다로 회사를 옮기고, 온두라스산 담뱃잎으로 그들의 플로리다 공장에서 미국 시장을 위한 시가 생산을 이어간다. 그렇게 쿠바의 호요와 온두라스의 호요는 각각 브랜드를 지키며, 여전히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시가이다.
2023-08-26 14:30:47